
조별 과제를 하다 보면 처음부터 존재감 없는 팀원이 한 명쯤 있지 않으신가요? 저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 팀원이 사실상 과제를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영화 「히든 피겨스」를 보면서 그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습니다. 1960년대 NASA에서 차별을 견뎌내며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한 흑인 여성 수학자들의 이야기가 결코 먼 나라 얘기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편견이 가린 능력 — 첫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대학교 조별 과제를 진행하면서 조용하고 발표 경험도 적은 팀원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저도 그 학생이 크게 기여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전형적인 편견이었는데, 당시엔 자연스러운 판단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영화 속 캐서린 존슨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녀는 천재적인 계산 능력을 가진 수학자였지만,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핵심 회의에 참석조차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NASA 내부에는 인종 분리(racial segregation) 정책이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인종 분리 정책이란 피부색에 따라 공공시설이나 직장 내 공간을 법적으로 나누던 제도로, 캐서린은 화장실 하나를 쓰기 위해 수백 미터를 뛰어야 했습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 능력을 쓸 무대조차 얻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함께 과제를 했던 그 팀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발표 자리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을 뿐,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자료를 찾아내고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과제가 진행될수록 팀원들은 자연스럽게 그 학생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최종 발표 자료의 핵심 아이디어 대부분이 그 학생에게서 나왔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꽤 흔한 일입니다. 첫인상이나 겉으로 보이는 태도만 보고 사람을 단정 짓는 순간, 우리는 정작 중요한 걸 놓치게 됩니다.
기회가 주어질 때 — 실력은 결국 증명된다는 걸 믿으시나요?
캐서린 존슨이 활약했던 1960년대는 미소 냉전(Cold War)이 우주 개발 경쟁으로 이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여기서 미소 냉전이란 미국과 소련이 직접 군사적 충돌 없이 정치·경제·기술 분야에서 경쟁하던 시대적 구도를 말합니다. NASA는 소련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우주비행사 존 글렌의 지구 궤도 비행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었고, 그 계산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역할이 캐서린에게 맡겨졌습니다.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존 글렌이 컴퓨터가 내놓은 궤도 계산 수치를 직접 캐서린에게 다시 확인해달라고 요청하는 부분입니다. 당시 NASA는 IBM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도입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메인프레임 컴퓨터란 대규모 연산을 처리하는 초대형 전산 장비로, 오늘날의 서버에 해당합니다. 첨단 기계보다 캐서린의 계산을 더 신뢰했다는 사실이 그녀의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캐서린뿐 아니라 도로시 본은 포트란(FORTRAN) 프로그래밍 언어를 독학으로 터득해 NASA의 전산화 전환에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포트란이란 1950년대에 개발된 초기 프로그래밍 언어로, 과학적 수치 계산에 특화되어 있으며 당시 가장 앞선 기술 중 하나였습니다. 메리 잭슨은 NASA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법원에 백인 전용 야간 학교 수강 허가를 직접 신청했습니다. 세 사람 모두 기회가 제한된 상황에서 스스로 길을 만든 것입니다.
이 세 인물이 공통적으로 보여준 것은 단 하나입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준비된 사람은 반드시 결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함께 과제를 했던 팀원도 그랬습니다. 팀원들이 그 학생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주기 시작한 순간, 조별 과제 전체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좋은 평가를 받은 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다양성이라는 실력 —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영화는 단순히 감동적인 실화를 재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회적 소수자에게 기회가 주어질 때 어떤 성과가 가능한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를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면 다양성과 포용성(Diversity, Equity & Inclusion, DE&I)의 실질적 가치를 증명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DE&I란 성별·인종·배경에 관계없이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조직 문화를 설계하는 개념으로, 최근 글로벌 기업들이 핵심 경영 원칙으로 채택하고 있는 가치입니다.
실제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팀이 더 창의적인 결과를 낸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구성원의 다양성이 높을수록 팀의 집단 지성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축적되고 있으며(출처: Harvard Business Review), 국내에서도 직장 내 다양성 확보가 조직 성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영화에서 일부 갈등이 비교적 빠르게 해결되는 장면들은 실제 역사의 무게감을 다소 가볍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현실의 캐서린 존슨이 인정받기까지 걸린 시간, 그 과정에서 감내해야 했던 모멸감은 2시간짜리 영화 한 편에 다 담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진 힘은 분명합니다. 차별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낭비적인 것인지를, 논리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로 전달한다는 점에서입니다.
오늘날에도 편견은 여러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조용한 팀원을 섣불리 무시하는 것도, 특정 직군이나 성별에 고정된 역할을 기대하는 것도 모두 편견의 연장입니다.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들이 보여준 것은 결국 "실력 앞에 색깔은 없다"는 단순하지만 강렬한 진실입니다.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지금 꼭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조용했던 팀원에게 연락하는 것이었습니다. 뒤늦게나마 제대로 인정해주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히든 피겨스」는 단순한 역사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누군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되묻는 영화입니다. 그 질문이 오래 남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