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 동네 기원 옆 공원에서 목격한 장면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합니다. 커다란 책가방을 멘 열 살 남짓한 아이 하나가 내기 바둑판 앞에 쭈뼛거리며 섰고, 결국 그 판의 최고수 노인을 조용히 무너뜨렸습니다. 그날의 전율이 영화 한 편보다 깊이 남은 건, 아이의 눈빛에 경쟁심이 아닌 순수한 몰입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열정이 경쟁심을 이기는 이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실력을 키우려면 이기겠다는 의지, 즉 승부욕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공원에서 본 아이는 달랐습니다. 노인들이 훈수를 두며 비웃을 때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고, 이기고 난 뒤엔 그저 해맑게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곤 학원 버스를 타러 사라졌습니다. 승리에 도취된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바둑 자체가 보상이었던 것입니다.
영화 속 체스 천재 조시도 비슷합니다. 그랜드마스터를 앞에 두고도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고, 상대를 경멸하거나 미워하라는 스승의 말에 "전 그 사람이 아니니까요"라고 담담히 말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입니다. 내재적 동기란 외부의 보상이나 압박이 아닌, 활동 그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과 만족감을 말합니다. 이것이 강한 이유는 소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겨야 한다는 압박은 패배 한 번에 무너지지만, 과정을 즐기는 사람은 실패조차 흥미로운 변수로 받아들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플로우(Flow) 상태라고 부릅니다. 플로우란 어떤 활동에 완전히 몰입해 시간 감각조차 사라지는 최적의 경험 상태를 의미하며, 긍정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체계화한 개념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플로우 상태에서는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과 집중력이 평상시보다 현저히 높아집니다(출처: Positive Psychology Center, University of Pennsylvania).
제가 직접 체험해본 바로도 이건 맞습니다. 무언가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질수록 사소한 실수에 과민해지고, 시도 자체를 꺼리게 됩니다. 반면 그냥 재미있어서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실력이 붙어 있는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으신가요. 순수한 열정이 경쟁심보다 지속 가능한 에너지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게 제 결론입니다.
몰입과 순수한 열정이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효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실패를 위협이 아닌 정보로 받아들여 학습 속도가 빨라집니다
- 외부 평가에 덜 흔들리므로 자신만의 전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 억지로 만든 노력보다 자발적 몰입 시간이 훨씬 길어집니다
- 번아웃(burnout) 없이 꾸준히 성장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경쟁심이 오히려 실력을 망치는 순간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많은 분들이 이기겠다는 의지가 강해야 실력도 는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그 반대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영화에서 조시가 슬럼프에 빠진 결정적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지지 않으려고 두고 있어"라는 대사가 그 상태를 정확히 설명합니다. 지는 것이 두려워지면 두는 수 하나하나가 경직되고, 결국 가장 안전한 수만 반복하다 무너집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를 수행 목표 지향성(performance goal orientation)과 학습 목표 지향성(mastery goal orientation)으로 구분합니다. 수행 목표 지향성이란 타인보다 잘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태도를 뜻하고, 학습 목표 지향성은 과제 자체를 이해하고 숙달하는 데 집중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연구들은 일관되게 학습 목표 지향성이 높은 사람이 장기적으로 더 높은 성취를 보인다고 보고합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공원의 그 할아버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매일 자존심을 걸고 내기를 두던 분들이었는데, 돌아보면 그분들의 실력은 수십 년째 제자리였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정작 수 읽기 깊이, 즉 수읽기 능력이 늘지 않았던 것입니다. 수읽기란 체스나 바둑에서 몇 수 앞을 머릿속으로 미리 계산하는 능력으로, 고수와 하수를 가르는 핵심 기술입니다. 그 공원에서 아이 하나가 단 한 판으로 그 차이를 증명해버렸습니다.
경쟁심이 지배하면 또 하나의 문제가 생깁니다. 체스 용어로 포지셔널 플레이(positional play)가 무너집니다. 포지셔널 플레이란 당장의 기물 교환보다 장기적인 기물 배치와 구조적 우위를 우선시하는 전략을 말합니다. 결과에 급급해질수록 눈앞의 전술에만 매몰되고, 판 전체의 흐름을 읽는 안목을 잃게 됩니다. 영화 속 스승 브루스 판돌피니가 "공원 애들은 전술만 쓰고 포지션은 무시한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승패에 집착하는 순간 놓치게 되는 것들을 한 번 직접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실력보다 결과가 먼저 보이기 시작하면, 아마 그때가 잠깐 멈추고 자신이 그 일을 왜 시작했는지 되돌아볼 타이밍일 것입니다.
지금 어떤 일에서 결과만 보이고 과정이 재미없어졌다면, 그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쟁심이 즐거움을 밀어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신호입니다. 공원의 그 아이처럼, 판을 바라보는 맑은 눈을 먼저 되찾는 것이 실력 향상의 실질적인 첫걸음입니다. 결과는 그다음에 따라옵니다. 이 순서를 바꾸지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