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200원짜리 볼펜 하나를 찾겠다고 서랍을 세 번 뒤집고, 결국 20분을 날린 날이요. 영화 라이터를 켜라를 보면서 "저게 말이 되냐"고 피식 웃으면서도,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 드는 건 그 때문일 겁니다.
300원짜리 집착이 만들어낸 슬랩스틱의 힘
라이터를 켜라는 전형적인 슬랩스틱 코미디(slapstick comedy) 구조로 시작합니다. 슬랩스틱이란 과장된 신체 행동과 황당한 상황을 반복하여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 장르로, 채플린의 무성 영화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장 오래된 웃음의 문법 중 하나입니다. 이 영화는 그 공식을 꽤 충실하게 따릅니다.
주인공 봉구는 예비군 훈련 비용도 없어 부모 지갑을 뒤지다 들키는 인물입니다. 제가 처음 봤을 때 이 오프닝 시퀀스(opening sequence), 즉 영화의 첫 장면부터 이야기의 분위기와 주인공의 처지를 단숨에 설정하는 도입부가 꽤 효과적이라고 느꼈습니다. 300원만 손에 쥔 채 라이터를 잃어버리고, 그것을 되찾으러 부산행 기차에 올라타는 발단까지의 흐름은 블랙코미디(black comedy)로서 나쁘지 않습니다. 블랙코미디란 비극적이거나 불편한 현실을 웃음의 소재로 삼는 장르인데, 봉구의 찌질함은 그 장치로 꽤 잘 작동합니다.
영화 속 봉구가 겪는 하루는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소한 물건 하나에 하루가 무너지는 감각'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버전입니다. 충전기 하나가 없어서 약속에 늦고, 우산 하나가 없어서 감기에 걸리고. 물건의 물리적 가격이 아니라 '그것이 없을 때 발생하는 불편의 크기'가 사람을 움직인다는 걸, 이 영화는 꽤 본능적으로 포착하고 있습니다.
사소한 물건에 얽매이는 심리와 관련해, 실제로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 분야의 연구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행동경제학이란 인간이 항상 합리적으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심리와 경제적 의사결정의 관계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손실 회피 편향(loss aversion bias), 즉 같은 크기의 이득보다 손실에 훨씬 강하게 반응하는 심리 현상이 봉구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딱 맞아떨어집니다. 라이터 하나를 '뺏겼다'는 인식이 봉구를 기차 지붕 위까지 올라가게 만드는 연료가 되는 셈입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이 영화가 초반에 확실히 성공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입니다. 웃기면서도 공감 가능한 동기를 만들어 낸 것이죠.
핵심 포인트:
- 슬랩스틱과 블랙코미디의 문법을 충실히 따른 초반 구성
- 손실 회피 심리를 본능적으로 건드리는 주인공의 행동 동기
- 사소한 물건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하루 전체 붕괴'라는 공감 포인트
- 봉구의 찌질함이 초반에는 웃음의 촉매로 효과적으로 기능함
개연성이 무너지면 공감도 함께 사라진다
제 경험상 이런 종류의 영화는 딱 한 가지가 중요합니다. 주인공의 집착이 얼마나 오래 납득 가능한 상태로 유지되느냐입니다. 라이터를 켜라는 아쉽게도 그 한 가지를 후반부에서 놓칩니다.
영화의 문제는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즉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과 인과관계의 흐름에서 발생합니다. 초반의 코믹한 동기는 갈등이 고조될수록 설득력이 옅어집니다. 기차 안에서 칼과 총이 오가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봉구가 라이터에만 집착하는 장면은, 블랙코미디의 과장법이라고 감안하더라도 관객의 감정 이입을 방해하는 수준에 이릅니다. 저도 중반부 이후 몇 번은 "제발 그냥 포기해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입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의 문제도 있습니다. 캐릭터 아크란 이야기 안에서 인물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궤적을 뜻하는데, 악역인 철구의 아크가 지나치게 단조롭습니다. 그가 박 의원에게 배신당한 사정이나 조직원들을 책임져야 하는 처지는 충분히 입체적인 악역을 만들 수 있는 재료였는데, 영화는 그를 끝까지 일차원적인 위협 도구로만 소비합니다. 그 결과 봉구와의 갈등이 단순한 충돌의 반복으로 느껴지고, 중반 이후 기차 장면의 긴장감이 눈에 띄게 떨어집니다.
2002년 당시 한국 상업영화의 장르 문법을 생각하면 이 영화의 시도 자체는 평가할 만합니다. 실제로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가 집계한 2002년 국내 박스오피스 통계를 보면, 당시 코미디 장르는 관객 동원력이 높은 주류 장르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그 안에서 라이터를 켜라는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과 사소한 집착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차별화를 꾀했고, 초반의 그 시도는 분명히 먹혔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기발한 소재를 끝까지 유지하려면 그에 맞는 서사의 밀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 영화가 역설적으로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봉구의 집착을 웃음으로 소비하려면 관객이 그 집착을 끝까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캐릭터의 감정적 동기가 훨씬 정교하게 설계되어야 했습니다.
결국 라이터를 켜라는 기발한 슬랩스틱으로 시작해 후반부 개연성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영화로 정리됩니다. 봉구가 기차를 멈추고 영웅이 되는 결말은 감동적으로 설계된 장면이지만, 그 과정에서 축적된 답답함이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아 여운보다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래도 이런 실험적 시도가 당시 한국 코미디 영화의 외연을 넓히려 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비슷한 소재의 영화를 찾는다면, 한정된 공간에서 인물들의 욕망이 충돌하는 구조를 더 정교하게 다듬은 작품들과 함께 보면 비교 감상의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